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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소개

의암의 사상과 활동

의암선생은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을 계승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일통대의(一統大義)를 핵심으로 충(忠)과 의(義)를 강조하였다.
한말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정신을 실천하였다.

사진 설명

재야유림의 위정척사사상

류인석 선생의 근간이 된 「위정척사사상」은 ‘옳은 것을 보위하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 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옳은 것이란 성리학 및 그와 연관된 모든 문화를 뜻하고, 사악한 것이란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문화를 뜻한다. 위정척사사상 핵심이 되는 소중화론을 비롯하여, 반개화론, 화맥불가단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
  • 소중화론(小中華論) : ‘화(華)’의 문화는 역대 현군의 큰 정치를 계승하고 선현의 올바름을 계승하는 것으로 중국과 우리나라가 계승 발전시켜왔는데 중국이 멸망함에 오직 우리나라에서만 ‘화(華)’문화를 보존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그 배경을 시조 단군에서 찾고 있어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높은 긍지의 표현으로 강렬한 민족의식이 흐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반개화론(反開化論) : 서양의 침략을 우려하고 그에 대한 배척논리를 이론화했던 척사 유생들은 개화의 물결을 망국사태로까지 인식하였으며 류인석 선생도 철저하게 반개화론을 주장하면서 국내의 개화파를 일제보다 심하다고 표현하였다.
  • 화맥불가단론(華脈不可斷論) : 비록 조선에서 화맥이 끊어졌다 하더라도 이국땅에서나마 단 하루라도 더 화맥을 보존하고자 하는 의지를 표명하였으며 후일 선생의 국외에서의 독립운동근거지 구상의 정신적 배경이 되었다.

의병초기의 (기의논리사상)

류인석선생이 의병활동을 하기 위해 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논리
  • 처변삼사론(處變三事論)
  • 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인 왜적을 깨끗이 소탕하는 것.
  • 거지수구(去之守舊) : 해외로 멀리 나가 선비로서의 대의를 홀로라도 지키는 것.
  • 자정치명(自靖致命) :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자결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

류인석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생각했으나 일본군과 대처할 수 있는 군사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의병봉기계획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 간주하였다. 하지만 목숨을 끊을 경우 화맥을 계승해야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함을 지적하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 의병운동 당위론(當爲論)
  • 재야의 백성들도 나라를 어지럽히는 관료와 도적의 무리들에 대해 응징을 가할 수 있다는 논리로 의병봉기에 대한 류인석 선생의 강한 의지를 반영하였다.
  • 관일약
  • 관일약은 향약제도의 일종으로 장기적 투쟁을 위한 자치규약이다. 이는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독립군 근거지 구상의 일환이었다. 류인석 선생은 국권회복의 달성이 단지 우리 민족만을 구하는 차원을 넘어 인류를 구하는 길이라고 설명하였다.
  • 관일약 실천강령
  • 목(目) : 애국(愛國) · 애도(愛道) · 애신(愛身) · 애인(愛人)
  • 요(要) : 마음을 사애에 두어 모든 사람이 같은 마음으로 통일되는 경지
  • 실(實) : 정(精)을 모으고 성(誠)을 하나로 하여 금석을 꿰뚫는 경지

우주문답의 만년기 류인석 사상

  • 세계관
  • 류인석 선생이 구상한 세계평화의 구조는 동양삼국(조선,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하되 삼국 중에서도 중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질서의 재편성이다. 세계질서(평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중심이 있어야 하는데 그 역할을 중국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것은 주역의 ‘대일통론’(大一統論)에 근거한 이론이다.
  • 유교국가 재건론
  • 정(精) : 나라와 백성을 경영하여 다스리는 것
  • 형(刑) : 백성들이 잘못하는 것을 금하고 백성을 착한 곳으로 이끄는 도구
  • 문(文) : 나라의 교화를 이루어 광화롭게 하는 것
  • 무(武) : 나라의 위세를 세우는 것
  • 군주제론
  • - 선양(禪讓)제도와 세습(世襲)제도를 주장
  • - 권력다툼의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세습제를 시행하여야 한다고 주장
  • 입헌제도 반대론
  • - 임금의 절대적 권위를 옹호하는 성리학적 근왕의식의 전형적인 형태
  • 귀족제도 옹호론
  • - 관직에는 귀족, 평민, 천민을 막론하고 현명한 자가 등용되어야 한다는 원칙에는 찬성하면서도 귀족제도를 옹호

서양문화의 비판과 부분적 수용

  • 평등사상 및 자유사상 비판 : 개화파들이 평등과 자유의 원리에 의해 사회제도를 개혁하려는 것에 반대
  • 공화정 반대 : 공화정을 실시하면 권력 다툼으로 인해 나라가 혼란되고 멸망할 것으로 생각
  • 서양종교 반대 : 기독교는 물러가고 공자의 가르침이 일어나 밝은 날이 올 것을 기대
  • 신학교 설립 반대 : 신학교는 기술교육만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반대하였으며 조선 사람은 전통적인 조선교육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 특히 여학교 설립을 반대하였으며 이는 남존여비의 봉건의식 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설명
  • 서양기술의 부분적 수용 : 서양문화에서 수용할 수 있다고 인정한 부분을 기술 분야에 한정하고 있으며 그 기술을 배울 때에는 우리의 전통사상을 굳게 지켜야함을 강조

의암의 생애

의암의 성장과 출생

의암 류인석 선생은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1842년 1월 27일 부친인 류중곤(柳重坤)과 모친인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字) 는 여성(汝聖)이며, 호(號)는 의암(毅菴)이고, 성(姓)은 고흥 류씨(高興柳氏)이다.

어려서부터 문재로 인정받아 14세 때에는 종숙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따라 양평으로 가서 당시 유학의 태두(泰斗)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배웠다. 그 뒤 중암(重菴) 김평묵, 성재(省齋) 유중교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의 학통을 이어 받아 양평, 춘천, 홍천, 원주, 제천 등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에서 모여든 유생들을 가르치며 거유로 성장했다.

  • 의암선생 반신초상화

    의암선생 반신초상화 義菴先生半身肖像畫

    118cm x 77.5cm

    근대

    류연창

  • 의암선생 전신영정

    의암선생 전신영정 義菴先生全身影幀

    132cm x 204cm

    2016

    권오창 작

의암의 활동기

1876(고종 13)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상소를 올렸으며, 1794(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을 적극 반대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제자 이필희(李弼熙),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주용규(朱庸奎), 서상열(徐相烈), 이범직(李範稷), 신지수(申芝秀) 등이 각기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류인석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흩어진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영월·평창 등을 돌며 새로 의병을 모아 제천 봉양면 장양리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 친일관리인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처단하고 충주로 진격하여 충주성을 점령,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형하였다. 그 후 패전하여 풍기, 소백산, 영춘, 청풍, 음성, 괴산을 옮겨다니며 유격전을 진행하였고 다시 영월, 정선, 평창에서도 혈전을 계속하다가 영홍, 양덕, 맹산, 덕천, 영변, 운산, 금산, 초산을 거쳐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통화현에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중 1900년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으로 귀국, 평안도 개천과 용청, 황해도 평산, 은율에서 후세교육에 이바지했다.

  • 류인석 상소문

    류인석 상소문柳麟錫上疏文

    26cm x 256cm

    1896

    독립기념관

    1896년에 작성된 것으로 명성황후가 궁궐에서 시해된 치욕을 씻고 적과 투쟁할 것을 권고하는상소문 초고이다.
  • 김구선생 고유문

    김구선생 고유문 金九先生 告由文

    22.5cm x 83cm

    1947

    백범 김구 선생이 귀국 후 의암 선생의 묘소를 찾아뵙고 절하며 올린 고유문이다.

의암의 노년기

1905년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여러 곳에 방문(榜文)을 보내어 의병의 기세를 돋구었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서울 이재억(李濟億)가에 잠입하여 양기택(梁起擇), 이갑(李甲) 등의 인 물과 함께 대책을 협의하였다.

1907년 가정리에서 그의 가족과 동민의 참살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1908년 2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관일약(貫一約)이란 조직체를 만들어 교포들을 지도하였다. 또 1909년 의병 부대를 조직, 지신허(地新墟)) 재피거우(梓皮溝)에서 13도의군 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세계만방에 호소문을 전달하는 한편 일본정부에 항의문을 보냈다. 그 후 나라를 구하려는 온갖 노력 끝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경에 밝아 소의신편(昭義新編), 화동합편(華東合編) 등의 저서가 있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의암의 의병활동

의병봉기의 배경

의병봉기의 기점은 1894년 갑오의병 부터다. 류인석은 1년 후, 단발령 공포 이후인 1895년 12월 24일(양1896.2.7.)에 의병항쟁에 나섰다. 류인석이 의병봉기에 나선 계기는 갑오왜란부터 마련되었고 그 후 을미년, 변복령,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련의 사태들이다.
류인석은 변복령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그에 대처할 방법으로 「처변삼사론(處變三事論)」을 내놓는다.

  • 거의소청(擧義掃淸) : 의병을 일으켜 나라의 원수인 왜적을 깨끗이 소탕하는 것.
  • 거지수구(去之守舊) : 해외로 멀리 나가 선비로서의 대의를 홀로라도 지키는 것.
  • 자정치명(自靖致命) : 세상을 등지고 스스로 자결하여 나라에 목숨을 바치는 것.
  •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陳)의 성립
  • 류인석의 제자 이필희, 안승우, 이범직 등 문인(門人)들은 만주지역으로 거지수구(去之守舊)를 결심한 류인석에게 일제 침략세력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실천적인 의병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당 시 류인석은 제자들에게 중국에서의 계획을 공식적으로 알렸는데 그의 제자들은 스승의 행동계획을 극구 만류하면서 함께 의병활동에 나설 것을 강력히 건의하였다. 이에 류인석은 모친상과 병사지휘 능력부족 을 들어 의병에 참여할 수 없다고 하였다. 류인석은 세차례의 걸쳐 사양했으나 결국 거지수구(去之守舊) 계획을 단념하게 되었다.
  • 마침내 류인석은 1896년 2월 7일 영월에서 의병대장에 취임하여 호좌창의진을 출범시키고, 먼저 「격고팔도열읍(檄告八道列邑)」 과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 격문을 발표하고 전국에 호소, 의병 봉기를 적극적으로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 제천으로의 이동과 충주성 점령
  • 류인석이 이끄는 호좌창의진은 1896년 2월 11일 영월에서 진군하여 친일적 관료인 단양군수 권숙과 청풍군수 서상기를 처형하였다. 이어 충주성을 공격하여 점령하고 충주부 관찰사 김규식을 일본의 앞잡이라는 반역죄로 참수하였다. 한편 호서방면으로 갔던 이범직은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하고, 서상렬과 원용정은 영남으로 이동하여 의병을 모아 활동하였다. 또한 춘천에서 봉기했던 이소응은 춘천관찰사 조인승을 처단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 춘천의병
  • 한말의병을 선도한 춘천의병들은 이항로 – 김평묵 · 류중교 – 류인석으로 이어지는 학문적 · 인맥적 체계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다. 이는 화서 이항로와 그의 문인 김평묵 · 류중교 · 류인석이 가평 설악면 · 춘천 신동면 증리(甑里) · 삼천리(三川里) · 남면 가정리(柯亭里) · 제천 장담리(長潭里)에서 강학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당시 춘천지역의 류중락(柳重洛) · 류중악(柳重岳) · 류홍석(柳弘錫) · 류영석(柳寧錫) · 이진응(李晋應) · 이소응(李昭應) 등은 바로 춘천의병을 주도한 중심인물들이었다.
  • 류인석 의병격고문

    류인석 의병격고문義兵檄告文

    24cm x 102cm

    1896

    독립기념관

    류인석 선생이 충주성을 점령한 후, 1896년 1월 14일자로 충남 목천木川지역에 발송한 의병봉기 촉구 격문이다.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앞 부분은 목천의 이공형二公兄에게 전령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뒷부분은 (음) 1895년 12월 의병을 봉기하면서 발표한 격고문檄告文이 덧붙여 있다. 명의는 호좌의병대장湖左義兵大將 류인석柳麟錫으로 되어있다.
  • 의병임명장 차첩

    의병임명장 차첩 差帖

    37.8cm x 48.8cm

    1896

    류인석 선생께서 의병 정운경鄭云敬을 전군장으로 임명하는 문서이다.정운경(1861-1939)의 자는 화백和白, 호는 송운松雲,정철의 후손이고 제천 출신이다. 류인석 선생과 함께 의병진에 참여하였고,1896년 3월 전군장에 임명되었다.

가흥전투, 남산전투

  • 가흥전투
  • 평민 의병장 김백선은 3월 16일 제천을 출발하여 17일 충주에 이르러 제천 본진에 병사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중군장인 안승우는 허락하지 않아 김백선은 지원 없이 진격을 계속하였다. 의병들이 19일 가흥 부근에 도착해 도망가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강 건너 가흥까지 진격해 갔으나 가흥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의 반격이 거세어 결국 의병진은 패배하였다.
  • 제천성 남산전투
  • 일본군과 연합하여 남한산성 연합 의진을 해산시킨 친위대 및 강화진위대는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한 관군의 인솔자 장기렴 참령은 충주 황강에 도착하여 3월 13일(양 4.25) 류인석에게 해산할 것을 종용하는 글을 보내자 의병진 일부에서는 왕명을 받아 온 군사들과 싸울 수 없으니 화친(和親)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강령론자인 안승우는 장기렴이 이끄는 관군을 왕사로서 인정할 수 없다 하여 화친을 반대하였다. 관군은 4월 13일(양 5.25) 제천을 향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날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의병들이 소지하고 있던 무기는 대부분 사격할 때마다 불을 붙여 사용하는 구식 화승총이었으며 결국 총을 사용할 수 없어 관군의 공격에 대항할 수 없었다. 중군장 안승우는 관군들의 뭇매를 맞고 전투현장에서 절명하였고 제천진영은 관군에게 함락되자, 류인석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단양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국외 망명과 의병근건지 건설

  • 중국 지역에서의 의병재기 모색
  • 류인석은 제천 남산전투(1896년 4월 13일)에서 패한 후, 서북행을 결정하고 1896년 7월 16일(양 8.24) 압록강변 초산(楚山)에 도착하였다. 아이성(阿夷城)에서 ‘재격백관문(再檄百官文)’을 발표하고 중국으로 망명한 류인석 의진은 심양으로 가 원세개(袁世凱)에게 군사요청을 하였으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돌아와 중국 통화현 오도구와 팔왕동에 의병근거지를 건설하였다. 오도구 지구는 이미 조선인이 만 여명이나 거주하고 있었으며 평야가 넓어 농사에 유리하고 의병을 양성 할 수 있는 근거지로 손색이 없었다.
  • 러시아 망명과 항일독립투쟁
  • 1907년 13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 실패로 더 이상 국내에서는 국권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의암은 러시아 연해주로 이동하였다. 1908년 10월(음) 연추(煙秋)에서 ‘의병규칙’을 제정하여 조직적인 의병활동의 지침으로 삼았으며, 1909년 7월(음)에는 의병활동의 장기적 전개를 위한 구상으로 관일약(貫一約)을 제시하였다. 1910년에 이르러 류인석은 5월 15일(양 6.21) 조직한 13도의군에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13도의군의 조직은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국내 · 만주 · 연해주 등 각지에 흩어진 민족의 역량을 집결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한 당시에 있어서는 대단한 과업이었다. 13도의군의 조직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 - 도총재 : 류인석(柳麟錫)
  • - 장의총재 : 이범윤(李範允)
  • - 도총소 참모 : 우병렬(禹炳烈)
  • - 의 원 : 이진룡(李鎭龍), 이갑(李甲), 홍범도(洪範圖), 안창호(安昌浩)

[성명회 취지서]
1910년 7월 17일(양 8.23)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류인석은 이를 규탄하고 무효를 선언하기 위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기 위해 ‘성명회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 성명회 취지서

    성명회 취지서 聲明會趣旨書

    크기 미상

    1910

    소장처 미상

    1910년 8월 일제의 강제병합을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로 결성하면서 발표한 취지문으로 각국 정부에 병합무효를 선언하는 전문과 ‘성명회 선언서’를 보내기로 결의한 내용을 담고 있다.

현시점에서 본 의암

의암사상의 현대적 의의

의암 류인석은 한말 유학자로 성리학과 유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한국유학사의 대표적 인물이다. 의암 선생은 한말 의병장이자 학자로서, 일제와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고 평화사상과 국제적 감각을 발휘했다.

의암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 문화를 지켜내고 한·중·일 삼국 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줬다.

류인석 의병활동의 역사적 의의

  • 반제국주의 이념을 명확히 제시하여 외세 침략에 대한 국민적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 전기의병(을미사변)시기 대규모 의병을 이끌고, 장기적으로 강렬한 무장항쟁을 전개하여 인근 의병봉기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국권회복을 위한 현실적 방안을 모색했다. 의병 근거지 개척 계획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여 국내 의병이 국외독립군으로 발전하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 국내 진공작전 외에 국권회복을 위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는 후일 독립운동이 다양하게 전개되는데 영향을 주었다.
  • 대립적이었던 의병운동과 계몽운동의 연합을 모색하여 민족단결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결과, 국권회복을 위한 이념대립이 해소되었으며, 13도의군이 조직되었다.

민족의 지도자 의암 류인석 선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