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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선생은 화서학파의 위정척사(衛正斥邪)사상을 계승하여 존화양이(尊華攘夷)와 일통대의(一統大義)를 핵심으로 충(忠)과 의(義)를 강조하였다.
한말 국가의 위기상황에서 우리의 전통문화를 지키기 위한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의리정신을 실천하였다.
재야유림의 위정척사사상
류인석 선생의 근간이 된 「위정척사사상」은 ‘옳은 것을 보위하고 사악한 것을 배척한다’ 라는 의미인데 여기서 옳은 것이란 성리학 및 그와 연관된 모든 문화를 뜻하고, 사악한 것이란 성리학을 제외한 모든 문화를 뜻한다. 위정척사사상 핵심이 되는 소중화론을 비롯하여, 반개화론, 화맥불가단론으로 정리할 수 있다.의병초기의 (기의논리사상)
류인석선생이 의병활동을 하기 위해 그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논리류인석 선생은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으로 생각했으나 일본군과 대처할 수 있는 군사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의병봉기계획을 포기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라 간주하였다. 하지만 목숨을 끊을 경우 화맥을 계승해야 하는 책무를 다하지 못하는 결함을 지적하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정하였다.
우주문답의 만년기 류인석 사상
서양문화의 비판과 부분적 수용
의암의 성장과 출생
의암 류인석 선생은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1842년 1월 27일 부친인 류중곤(柳重坤)과 모친인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고흥(高興)이고, 자(字) 는 여성(汝聖)이며, 호(號)는 의암(毅菴)이고, 성(姓)은 고흥 류씨(高興柳氏)이다.
어려서부터 문재로 인정받아 14세 때에는 종숙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를 따라 양평으로 가서 당시 유학의 태두(泰斗)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에게 배웠다. 그 뒤 중암(重菴) 김평묵, 성재(省齋) 유중교가 세상을 떠나자 그들의 학통을 이어 받아 양평, 춘천, 홍천, 원주, 제천 등 강원도, 경기도, 충청도에서 모여든 유생들을 가르치며 거유로 성장했다.
의암선생 반신초상화 義菴先生半身肖像畫
118cm x 77.5cm
근대
류연창
의암선생 전신영정 義菴先生全身影幀
132cm x 204cm
2016
권오창 작
의암의 활동기
1876(고종 13)년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할 때 상소를 올렸으며, 1794(고종 31)년 갑오경장 이후 김홍집(金弘集)의 친일내각을 적극 반대하고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제자 이필희(李弼熙), 안승우(安承禹), 이춘영(李春永), 주용규(朱庸奎), 서상열(徐相烈), 이범직(李範稷), 신지수(申芝秀) 등이 각기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하고, 류인석선생을 대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는 흩어진 의병을 모집하는 한편, 영월·평창 등을 돌며 새로 의병을 모아 제천 봉양면 장양리에서 부대를 정비한 후, 친일관리인 단양군수 권숙(權潚)과 청풍군수 서상기(徐相耆)를 처단하고 충주로 진격하여 충주성을 점령, 관찰사 김규식(金奎軾)을 처형하였다. 그 후 패전하여 풍기, 소백산, 영춘, 청풍, 음성, 괴산을 옮겨다니며 유격전을 진행하였고 다시 영월, 정선, 평창에서도 혈전을 계속하다가 영홍, 양덕, 맹산, 덕천, 영변, 운산, 금산, 초산을 거쳐 만주로 건너갔다. 그는 통화현에서 후학양성에 힘쓰던 중 1900년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으로 귀국, 평안도 개천과 용청, 황해도 평산, 은율에서 후세교육에 이바지했다.
류인석 상소문柳麟錫上疏文
26cm x 256cm
1896
독립기념관
김구선생 고유문 金九先生 告由文
22.5cm x 83cm
1947
의암의 노년기
1905년 ‘한일협상조약(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여러 곳에 방문(榜文)을 보내어 의병의 기세를 돋구었고 1907년 ‘정미조약’이 체결되자 서울 이재억(李濟億)가에 잠입하여 양기택(梁起擇), 이갑(李甲) 등의 인 물과 함께 대책을 협의하였다.
1907년 가정리에서 그의 가족과 동민의 참살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에서 활동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1908년 2월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 관일약(貫一約)이란 조직체를 만들어 교포들을 지도하였다. 또 1909년 의병 부대를 조직, 지신허(地新墟)) 재피거우(梓皮溝)에서 13도의군 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에 추대되어 세계만방에 호소문을 전달하는 한편 일본정부에 항의문을 보냈다. 그 후 나라를 구하려는 온갖 노력 끝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봉천성(奉天省) 관전현(寬甸縣)에서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경에 밝아 소의신편(昭義新編), 화동합편(華東合編) 등의 저서가 있고,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의병봉기의 배경
의병봉기의 기점은 1894년 갑오의병 부터다. 류인석은 1년 후, 단발령 공포 이후인 1895년 12월 24일(양1896.2.7.)에 의병항쟁에 나섰다. 류인석이 의병봉기에 나선 계기는 갑오왜란부터 마련되었고 그 후 을미년, 변복령, 을미사변, 단발령 등 일련의 사태들이다.
류인석은 변복령과 단발령이 공포되자 그에 대처할 방법으로 「처변삼사론(處變三事論)」을 내놓는다.
류인석 의병격고문義兵檄告文
24cm x 102cm
1896
독립기념관
의병임명장 차첩 差帖
37.8cm x 48.8cm
1896
가흥전투, 남산전투
국외 망명과 의병근건지 건설
[성명회 취지서]
1910년 7월 17일(양 8.23) 일제가 조선을 병탄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류인석은 이를 규탄하고 무효를 선언하기 위해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독립의 의지를 세계에 표명하기 위해 ‘성명회 취지서’를 작성하였다.
성명회 취지서 聲明會趣旨書
크기 미상
1910
소장처 미상
의암사상의 현대적 의의
의암 류인석은 한말 유학자로 성리학과 유교의 정통성을 계승한 한국유학사의 대표적 인물이다. 의암 선생은 한말 의병장이자 학자로서, 일제와 서양 열강의 침략에 맞서 저항하고 평화사상과 국제적 감각을 발휘했다.
의암은 우리 민족의 주체적 문화를 지켜내고 한·중·일 삼국 연대의 중요성을 일깨워 줬다.
류인석 의병활동의 역사적 의의